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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9대 임금 성종과 11대 임금 중종의 능인 서울 강남 선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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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남 선정릉 정보 조선왕릉은 조선(1392~1987)의 왕과 왕비 그리고 대한제국(1897~1910)의 황제와 황후 73명의 무덤을 통틀어 가리키는 말입니다. 능은 모두 42기가 있으며, 북한에 있는 2기를 제외한 40기가 200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왕조는 왕릉 조성과 관리에 효와 예를 갖추어 정성을 다했습니다. 풍수사상에 따라 최고 명당에 왕릉 자리를 정하고 주변 지형과 경관을 그대로 살려 능을 만들었습니다. 왕릉을 짓고 관리하는 일을 상세하게 적은 기록이 풍부하게 남아 있고, 지금도 각 왕릉에서는 해마다 제향을 드리며 전통을 잇고 살아 있는 문화유산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선릉은 조선 9대 왕 성종과 정현왕후 윤씨의 능이며, 정릉은 성종과 정현왕후의 아들인 11대 왕 중종의 능입니다. 1544년 중종이 세상을 떠난자 중종의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 윤씨의 곁에 모셨는데, 1562년 중종의 정릉을 선릉의 동쪽으로 옮기면서 선릉과 장릉을 가까운 거리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1970년대 강남 지역이 개발되면서 선릉과 정릉 주위로 높은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서게 되어, 두 능은 도심의 회색 숲속에 있는 녹색 섬처럼 남게 되었습니다. 

도심 속 천년고찰 서울 강남 봉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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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남 봉은사 정보 봉은사(奉恩寺)는 연회국사(緣會國師)가 794년에 견성사(見性寺)란 이름으로 창건하였다. 1550년에 선교 양종체계가 부활하면서 봉은사는 선종 수사찰(禪宗首寺刹)이 되어 보우스님을 주지로 삼아 불교를 중흥하는 중심도량으로 교종수사찰인 봉선사와 함께 불교계를 이끌게 된다. 이후 1562년 9월에 선릉의 동쪽 기슭에 있던 옛 봉은사 터에 중종의 정릉(靖陵)이 천장되면서 봉은사는 지금의 위치에 확장 이건 되었다. 병자호란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으나, <봉은사중수기>에 의하면 백곡스님이 1670년경 다시 중창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1790년에는 전국 불교를 관장하는 다섯 규정소(糾正所)의 하나로 꼽혔으며, 1856년에는 화엄경 80권 판각을 이루었다. 더불어 당시 추사 김정희가 사망하기 3일 전에 쓴 것이라고 전해지는 판전의 편액과 건물은 당시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남아 있다. 1911년에 일제가 사찰령을 반포하여 봉은사가 경기도 일원의 8군 78개 말사를 관활하게 하였는데, 이때부터 서산대사의 법손이 주지를 하도록 하는 봉은사본말사법을 인가받아 시행하였다. 을축년(1925) 대홍수 때는 주지 청호스님을 중심으로 사중의 모든 재물을 풀어 이재미니 708인을 구하기도 하엿다. 1939년 화재로 인해 판전을 제외한 건물들은 모두 전소되고 말았는데, 현재 남은 당우는 1941년에 태욱스님이 중창한 것이다. 1964년에는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의 수련도량의 기능을 하였고,  1972년에는 동국역경원이 설치되어 대장경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전당이기도 하였다. 현재는 강남의 포교활동과 사회복지를 실현하는 도심사찰로, 외국에 한국불교문화를 전파하는 중심도량이다. 

연천 전곡리유적 및 전곡선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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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 전곡리유적 정보 동아시아에서 아슐리안 주먹도끼가 처음 확인된 구석기시대 유적인 연천 전곡리 유적(漣川 全谷里 遺蹟, Archaeological Site in Jeongok-ri Yeoncheon)은 약 수십만 년전 구석기 시대 사람들이 남긴 생활 흔적이 확인된 곳립니다. 1978년 이곳에 발견된 주먹도끼는 동아시아 구석기문화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인류의 석기 제작 기술과 이동 경로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전곡리 유적은 인류 공통의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는 유적으로, 그 가치를 널리 알리고 보존하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1억년 전으로의 여행, 철원 한탄강 고석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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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 고석정 정보 고석정은 한탄강 협곡에 홀로 우뚝 서 있는 화강암 바위와 일대의 정자를 일컬어 부른다. 이 일대의 기반암을 주로 구성하고 있는 화강암은 1억년 전의 중생대 백악기에 용암에 의해서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약 54만 년~12만 년 전에 분출한 현무암질 용암류에 의해 고석은 완전히 파묻혔고, 이후 강물의 침식작용을 받아 다시 지표에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따라서 고석은 용암대지 형성 이전의 원지형을 관찰할 수 있는 중요한 지형·지질 유산입니다. 또한 아름다운 경관으로 인해 영화와 드라마의 촬영 장소이기도 합니다. 

철원 승일공원과 승일교, 한탄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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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 승일공원과 승일교, 한탄대교 정보 1. 승일공원 승일공원(昇日公園)은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내대리에 위치한 공원으로 승일교와 한탄대교의 동쪽한 위치한 근린공원이다. 승일공원에는 태봉구문과 주상절리 조형물이 있고 승일공원의 육각정자인 승일정에서 한탄강의 승일교와 한탄대교 및 한탄강의 절경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다.  2. 승일교 철원 승일교(鐵原 昇日橋 또는 承日橋, 국가등록유산)는 1948년 8월 북한이 착공하여 1958년 12월 3일에 남한이 완공한 다리이다. 시작과 완성의 시공법과 주체가 달라 아치의 크기 등 모양이 겉으로 구별된다. 분단과 한국전쟁이 빚은 독특한 의의가 있다. 승일교가 완공되기 전에는 남한군이 임시로 목조 다리를 놓아 통행하였다. 지금은 승일교를 보행자 전용으로 사용하고 바로 옆에 한탄대교를 개설하여 차량이 통행하도록 하고 있다. 북한이 이 지역을 점거하던 때, 동송읍 장흥리와 철원 및 김화 지역의 주민을 '노력공작대'라는 이름으로 동원하여 공사을 시작하였다. 다리의 절반 정도를 시공하였을 무렵 한국 전쟁으로 인해 공사가 중단되었다. 수복 이후 남한이 다른 공법을 사용하여 나머지 구간을 공사하고 완성하면서 '승일교'라고 이름하였다. 이 이름에는 두 가지 유래가 전해져 온다. 하나는 당시 남한과 북한의 통치자 이름을 한 글자씩 따왔다는 것이다. 곧 이승만의 '승' 김일성의 '일'을 합하여 부르는 말이라고 한다. 다른 하나는 한국 전쟁에서 박승일 장군의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이름을 따와서 지었다는 이야기이다.  3. 한탄대교 한탄대교(漢灘大橋)는 1997년 공사를 시작하여 교량 연장 166.8m, 폭 9.5m의 규모로 건설되었으며 승일교를 대체하기 위해 지어진 다리이다. 

서울 한양도성길 인왕산과 남산 구간 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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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양도성길 인왕산과 남산 구간 정보 1. 인왕산(仁王山, 338.2m) 서울특별시의 종로구와 서대문구에 걸쳐 위치한 산이다(고도:338.2m). 『신증동국여지승람』 한성부에 “백악 서쪽에 있다.”하였다. 산명은 『광해군일기』 1613년(광해군 8)에 “인왕(仁王)은 석가(釋迦)의 미칭(美稱)으로 산에 예전에 인왕사(仁王寺)가 있었으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이었다.”고 하여 그 유래를 알 수 있다. 다른 이름으로는‘필운산(弼雲山)’이 있는데 필운은 서산(西山)을 뜻한다. 1537년(중종32) 명나라 사신 공용경에게 주산인 백악과 서쪽인 왕산의 이름을 지어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이에 서쪽의 인왕을 ‘우필운룡(右弼雲龍)’에서 따와 ‘필운’이라 하였다. 이 명칭은 정착되지 못하고, 필운동과 필운대의 지명만 남아 있다. 『춘성유기』에는 인왕산을 “마치 사람이 팔짱끼었던 양 팔을 풀어 놓은 것 같기도 하고, 양 어깨에 날개가 돋힌 듯하다.”고 묘사하고 있으며, 『한경지략』에 “인왕산은…… 도성이 그 산마루를타고 쌓아져 있는데 험준한 곳을 곡성이라 한다.”고 하였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에 “양정이 여러 위의 군사를 거느리고 인왕산에서 표범을 몰이하다.”와 『동국여지비고』 경도편에 “성랑 근처에는 모두 돌을 높이 쌓았는데, 인왕산은 몹시 험하여 5개 처(處) 80보를 쌓지 않았다.”를 통해 산세가 험했음을 알수 있다. 이전에 한자어로 ‘仁旺山’으로 지도에 기록되었으나 1995년 ‘仁王山’으로 지명이 변경되었다.  2. 남산(南山, 木覓山, 271m)  서울시의 중구와 용산구에 걸쳐 위치한 산이다(고도:271m).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목멱산(木覓山)은 곧 도성의 남산인데, 인경산(引慶山)이라고도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도성의 남쪽에 있는 산이라는 일반화된 이름이고, 고유명은 목멱산·인경산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경지략』에 “목멱산은……흔히 일컬어 남산이라 하는데, 마치 달리는 말이 안장을 벗은 형상이고 산마루에는 봉수대가 ...

중국의 유명한 장군인 관우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인 서울 동관왕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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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동관왕묘 정보 동관왕묘는 서울의 동쪽에 있는 관왕묘라는 뜻으로, 관왕묘는 중국의 장수 관우(關羽: 162~219)의 조각상을 두고 제사를 드리는 사당이다.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명나라의 요청으로 1601년(선조 34)에 지었다. 명나라에서는 공자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인 문묘(文廟)처럼 관우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을 무묘(武廟)라 하여 크게 숭배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조선시대 후기에 무묘를 많이 지었다. 동관왕묘의 중심건물은 두 개의 건물이 앞뒤로 붙어 있는데, 이것은 중국의 절이나 사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조다. 지붕은 높은 丁자 모양과 ㅡ자 모양이 합쳐진 工자 모양이다. 실내 공간도 앞뒤로 나뉘어 있는데, 앞은 제례를 위한 전실이고 뒤는 관우와 부하장군들의 조각상을 둔 본실이다. 전실과 본실을 감싼 벽돌 벽의 바깥에는 다시 기둥을 두어 처마를 받치고 있다. 관왕묘는 서울의 동서남북에 모두 지어졌는데 그 중 동관왕묘가 제일 규모가 크고 화려하다. 넓은 벽돌벽과 독특한 지붕모양, 조각상, 실내의 구성과 장식 등에서 중국풍 건축의 모습을 보여주는 17세기 제사시설로,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 곳이다.

서울 남산의 한양도성 유적전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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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양도성 유적전시관 정보 한양도성 유적전시관은 2013~2014년 발굴조사를 통해 드러난 성벽 유적을 전시하고 있다. 이 유적은 한양도성 남산 구간의 일부로 그동안 멸실된 줄로만 알았던 성벽구간이다. 전시관이 자리잡은 남산 자락은 한양도성의 오랜 역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장소이다. 한양도성 유적(1396)-조선신궁 배전 터(1925)-남산 분수대(1969) 등을 포괄하는 전시관 권역에서는 조선시대 축성의 역사, 일제 강점기의 수난, 해방 이후의 도시화, 최근의 발굴 및 정비 과정을 모두 볼 수 있다. 

대한제국의 황궁인 서울 덕수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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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덕수궁 정보 덕수궁(德壽宮, Deoksugung Palace) 터에는 월산대군(1454~1488)의 후손을 비롯한 왕족들과 고관들의 저택들이 있었다. 임진왜란으로 서울의 모든 궁궐이 불타 없어지자 선조는 이 집들을 수용하여 임시로 거처하는 행궁으로 사용하였다가, 광해군이 1611년에 재건한 창덕궁으로 어가를 옮기면서 별궁인 경운궁(慶運宮)이 되었다. 이후 19세기 중엽까지는 궁궐로서 큰 역할이 없다가 1897년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경운궁을 대한제국의 으뜸 궁궐로 삼았고 많은 전각들을 새로 세워 궁궐의 격식을 갖추어 나갔다. 또한 근대화를 향한 고종의 의지에 따라 궁 안에 여러 서양식 건물들을 세웠다. 그러나 1880년대 정릉동 일대는 각국 외교사절의 공관과 선교사들의 주택이 밀집해 있어서 경운궁의 궁역을 확장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기존의 미국·영국·러시아영사관 사이로 궁역을 확장하다 보니 대지의 모양이 불규칙하게 된 것이다. 1907년에 고종이 퇴위하면서 선황제의 거처가 되어 궁의 이름을 덕수궁으로 바꾸었으며, 태평로를 확장하면서 궁역이 축소되었다. 고종이 승하한 후에는 북쪽 선원전과 서쪽 증명전 일대도 매각되어 원래 넓이의 1/3만 남게 되었다. 1933년에는 중심 부분과 몇 개의 양관(洋館)만 남고 대부분이 전각들이 철거된 후에 공원으로 조성되어 일반에 개방되었다. 현재는 중심부인 중화전 일원과 정관헌 및 석조전과 같은 양관들의 남아있다. 덕수궁은 임진왜란과 구한말이라는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으뜸 궁궐로서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던 상징적 공간이었다. 또한 전통 규범 속에 서양식 건축을 수용한 근대적 궁궐이며, 주변 상황의 공간적 맥락에 맞추어 조성한 도시적 궁궐이었다.

서울 종로의 흰 구름이 떠있는 계곡, 백운동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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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백운동천 정보 인왕산 백운동 계곡은 서울특별시 기념물로 지정이 되어 있는 곳이다. 인왕산은 대부분 암벽이고 험준하지만 산수 자연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백운동은 흰 구름이 떠 있는 계곡이라는 의미로 '동(洞)'은 현재의 행정구역을 의미하는 '동'이 아니라 '골짜기', '계곡' 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일찍이 조선 전기부터 당대의 사대가로 칭송받던 김수온, 이승소, 사숙재, 강희맹, 점필재, 김종직 등이 백운동 경치의 아름다움을 시로 표현한 바 있으며, <용재총화>, <신증동국여지승람>, <연려실기술> 등에서도 한양도성 내에서 경치가 가장 좋은 다섯 군데의 명소(삼청동, 인왕동, 쌍계동, 백운동, 청학동) 중 하나로 언급되었다. 겸재 정선의 장동팔경첩 중 하나인 <백운동>의 회화에서도 그 가치를 확인할 수 있다.  대한제국의 법무대신을 지낸 김가진이 이곳에 백운장이라는 정자를 세워 1910년 국권 상실 후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 이곳에서 활동했다고 한다. 지금도 백운장 터의 일부와 "백운동천(白雲洞天)"이라고 쓴 그의 바위글씨가 남아 있다. 

서울·구리 망우산 방정환 묘, 용마산, 아차산 연계 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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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구리 망우산, 용마산, 아차산 정보 1. 망우산(忘憂山, 해발 281.3m) 망우리란 지명은 조선 태조 이성계가 현재의 건원릉 자리를 답사하고 무학대사의 권유로 자신의 능지(陵地)로 결정하였고 기쁜 마음으로 환궁하던 중 지금의 망우리고개에 올라 "내가 이땅을 얻었으니, 근심을 잊을 수 있겠다'라고 경탄한데서 "망우리(忘憂里)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망우산은 해발 281.3m로 서울시립장묘사업소 망우묘지가 있고 망우리공원에는 방정환, 오세창, 한용운, 지석영, 조봉암, 명온 공주, 이중섭 등이 안장되어 있다.  2. 용마산(龍馬山, 해발 348m) 높이는 해발 348이고, 예로부터 중랑천 지역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고구려가 전쟁에 대비해 만든 소규모 요새지인 보루 유적이 있다. 산에는 아기 장수 전설이 전해지는데, 삼국시대에는 장사가 태어나면 가족을 모두 역적으로 몰아 죽이는 때가 있었다고 한다. 백제와 고구려의 경계였던 이곳에서 장사가 될 재목이 아기가 태어났는데, 걱정하던 부모가 아기를 죽여버렸으며 그 뒤 용마봉에서 용마가 나와 다른 곳으로 날아간 데서 용마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또는 조선시대 산 아래에 말 목장이 많아 용마가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용마산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고도 한다. 3. 아차산(峨嵯山, 해발 295.7m) 사을시의 광진구, 중랑구와 경기도 구리시에 걸쳐 위치한 산이다(고도:295.7m). 조선시대에는 양주목에 속하였다. 『삼국사기』에는‘아차(阿且)’와 ‘아단(阿旦)’ 2가지가 나타나며, 『고려사』와 『세종 실록』 「지리지」에는 ‘아차(峨嵯)’로 기록되어 있다. 아단성(阿旦城)이 아차성(阿且城)으로 다시 아차성(峨嵯城) 으로 표기가 변화되어 오늘날의 지명으로 정착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경기지』 양주조에는 “화양사(지금의 영화사) 가 악계산(嶽溪山)에 있다.”고 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 승람』 양주목에 “주 남쪽 67리 지점에 있다.”와 『여지도서』...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석성, 서산 해미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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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해미읍성 정보 해미읍성(海美邑城)은 조선시대 충청도의 전군(全軍)을 지휘하던 병마절도사영성(兵馬節度使營城)이다. 이 성은 고려 말부터 침입이 잦았던 왜구에 효과적으로 맞서기 위하여 덕산에 있던 충청병마도절제사영을 해미로 옮기면서 1417(태종17)부터 쌓기 시작해 1421년(세종3)에 완공되었다. 주 출입구인 진남문(鎭南門)은 잘 다듬어진 돌로 만든 반원형의 홍예문이다. 성 밖은 해자(垓字)로 둘렀는데 발굴조사를 통해 북쪽 해자의 일부를 복원했다. 기록에는 성벽 위에 여장(女墻)이 있었다고 되어 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성곽 둘레는 1500m이며 높이는 5m로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성 주변에 탱자나무를 심었다. 흔히 '탱자 성'이라는 뜻으로 지성(枳城)이라고도 한다. 이곳은 1622년(효종3)까지 230여 년간 병마절도사영의 기능을 하였지만,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옮겨간 후 해미 현감이 겸영장(兼營將)이 되면서 해미읍성이 되었다. 충청도 5군영 중 하나인 호서좌영(湖西左營)으로 1895년 행정구역이 개편될 때까지 243년간 내포 지방 12개 군현의 군권을 지휘하였다. 영장(營將)은 도적이나 반란 세력을 토벌하는 토포사(討捕使)의 임무도 맡았으므로, 이곳은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 시기에 내포 지역의 신자들이 끌려와 죽임을 당하는 순교의 현장이기도 하다. 해미읍성에는 병마절도사와 겸영장이 집무하던 동헌(東軒)을 비롯해 관아(官衙)와 객사(客舍) 등이 꽉 들어차 있어 장관이었다고 한다. 1579년(선조12)에 이순신 장군이 군관으로 10개월간 근무한 적도 있고, 조선 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이 해미에서 유배 생활하며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1910년 읍성 철거령에 따라 시설물은 모두 철거되었고, 성안으로 민가가 들어서면서 옛 모습이 거의 사라졌다. 그러다가 1973년부터 정비에 들어갔고, 1997년부터는 발굴이 이루어져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 해자(垓字) :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주위를 파 경계로 삼은 구덩이...

청벚꽂과 왕벚꽃이 활짝 핀 서산 개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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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개심사 정보 개심사(開心寺)는 충남 서산시 운산면 신창리에 위치한 충남 4대 사찰중의 하나로써 백제 의자왕 14년인 654년에 혜감국사가 창건하여 고려 충정왕 2년인 1350년에 처능대사에 의하여 중수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대웅전의 기단만이 백제 때의 것이고 건물은 조선 성종 6년(1475)에 산불로 소실된 것을 조선 성종 15년(1484)에 다시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보물 제143호인 대웅전은 창건당시의 기단 위에 조선 성종 15년(1484)에 중창한 다포식과 주심포식을 절충한 건축양식으로 그 작법이 미려하여 건축예술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또한 사찰을 중심으로 우거진 숲과 기암괴석 그리고 석가탄신일을 전후하여 만개 하는 왕벚꽃은 주위 경치를 더욱 아름답게 하고 사찰 주변이 온통 왕벚꽃으로 만발해 마치 속세의 시름을 잊은 선경에 와 있는 듯한 감동 마저 느끼게 한다.

국보로 승격된 보원사지 오층석탑이 있는 서산 보원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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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보원사지 정보 통일신라 이전부터 사찰이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보원사지는 가야산 북쪽에 위치에 있으며 102.886㎡의 웅장한 규모를 자랑한다. 고려 광종 때는 법인국사 탄문이 파견될 정도로 국가에서 관리하던 큰 사찰이었고 조선시대에 「신중동국여지승람」(1503년)에 '보원사가 상왕산에 있다'는 기록을 볼 때 16세기까지 그 사세가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계의 양식기반 위에 통일시라싣애와 고려 초기 석탑양식을 고루 갖춘 오층석탑과 통돌을 장방향으로 만든 석조, 법인국사의 생애가 기록된 법인국사탑비, 큰 불교행사가 있을 때 불기나 행사기를 다는 당간을 세우기 위한 당간 지주, 법인국사 탄문의 사리를 모시기 위한 부도탑인 법인국사탑 등 5점의 국보 및 보물을 볼 수 있다. 

서원 건축의 백미, 대구 달성 도동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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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달성 도동서원 정보 도동서원(道東書院)은 조선 시대 유학자인 한훤당 김굉필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자 세운 서원이다. 이 서원은 소수서원 · 병산서원 · 도산서원 · 옥산서원과 함께 우리나라 5대 서원 중 하나이며, 고종 때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보존된 47개 서원 가운대 하나이다. 이 서원은 선조 1년에 쌍계서원이란 이름으로 현풍 비술산 기슭에 세워졌지만,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다. 그 뒤 선조 37년베 보로동서원이란 이름으로 지금 이 자리로 옮겨 다시 세웠으며, 광해군 2년에 '도동' 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서원의 정문인 수월루 아래 외삼문과 환주문을 지나면 강당인 중정당과 유생들이 기거하던 동재와 서재가 있다. 중정당 오른쪽 건물은 서원 관리인이 살았던 전사청이고, 왼쪽 뒤편의 건물은 목판과 유물을 보관하던 장판각이다. 중정당 뒤편에 있는 돌계단을 오르면 사당으로 들어가는 내삼문과 사당이 있으며, 내삼문 오른쪽에는 제기를 보관하는 증반소가 있다. 도동서원은 수월루에서 높은 곳을 따라 환주문 · 중정당 · 사당을 일직선상에 두어 앞에는 학문을 연구하는 강학 영역, 뒤에는 제사를 지내는 사당을 배치한 '전학후묘' 구조이다. 또한 흙과 기와로 쌓아 만든 담장을 둘러서 검소하고 단아하면서도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과 조화를 이룬다는 점에서 한국 서원 건축의 전형을 보여준다 

강진의 천년고찰 무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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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무위사 정보 무위사(無爲寺, Muwisa Temple)는 「무위사사적(無爲寺事跡」에 의하면, 무의사는 원효스님에 의해 창건되고 도선국사에 의해 중창되었다고 한다. 무위사의 역사는 선각대사 형미스님(逈微)이 중창한 10세기 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무위사는 고려 초에는 선종사찰로 유명하였으나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는 수륙사(水陸社)로서 유명하였다. 죽은 영혼을 달래주는 수륙재(水陸齋)를 행하였던 사찰이었던 만큼, 중심 건물은 극락세계를 관장하는 아미타여래를 모신 극락보전(국보13호)이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은 극락보전으로, 우리나라 조선 시대 불교 건축물 중에서 초기 형태에 속한다. 눈여겨 볼 것은 맞배지붕과 주심포 양식으로 지어진 극락보전의 단아하면서도 소박한 건축미이다. 특히 극락보전 측면의 기둥과 보가 만나 이루는 공간 분할의 절제된 아름다움도 놓쳐서는 안 될 감상포인트다. 또한 단정하고 검소한 극락보전의 겉모습과 달리 서방 정토 극락세계를 묘사한 화려한 건물 내부는 물론, 조선 초기 불교 미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불상과 불화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이다.

영암 도갑사와 도선국사·수미선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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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 도갑사와 도선국사·수미선사비 정보 1. 도갑사 도갑사는 통일신라말 도선국사(道詵國師, 826~898)가 헌강왕 6년(880년)에 창건했다고 전해져오고 있으며, 1999년 대웅전 뒤편 건물지 발굴조사에서 백제시대 기와편이 출토되어 통일신라시대 이전에 이미 사찰이 있었음을 추정하고 있다. 도갑사가 크게 번창한 때는 조선시대 초기이다. 이곳 영암 출신인 수미왕사(首眉王師)가 1457년부터 1464년까지(세조3~10년) 대대적으로 중창했는데, 당시 건물 규모가 966칸에 달하는 대가람을 이루었고 소속된 암자가 12곳, 도갑사에 머무르며 수행하는 승려가 780명에 이룰 정도로 번창해 오다가 1598년 정유재란으로 많은 문화재가 소실되는 피해를 입었으나 전란이후 다시 부흥하기 시작하여 17세기 후반까지 계속되었다. 그 뒤 영조 52년(1776년)과 헌종 원년(1835년)에도 일부 중창이 있었다. 근래에 도갑사는 한국전쟁(1950년)과 화재등으로 많은 가람이 소실되었으나 1995년부터 1999년까지 실시한 네 차례 발굴조사에서 옛 가람 배치를 확인하고 복원불사를 추진하고 있다. 현재 경내에는 도갑사 해탈문(국보 제50호)등 국가지정 문화재 5점과 도갑사 석조(유형문화재 제150호)등 전라남도 지정문화재 5점이 있다. 또한 전체가 전라남도 기념물 제3호인 월출산(月出山)은 빼어난 산세와 절묘한 기암절벽, 아름다운 풍광으로 호남의 소금강으로 불리운다. 통일신라때는 "월나악(月奈岳)", 고려시대에는 "월생산(月生山)"으로 불리다가 조선시대에 월출산이라 이름하여 오늘에 이른다. 구정봉 정상 바로 아래에는 국보 제114호인 마애여래좌상과 보물 제1283호인 용암사지 3층석탑이 있고 용추폭포·구절폭포·금릉경포대 등이 장관을 이룬다.  2. 도선국사·수미선사비 도선국사·수미선사비는 1653년(조선 효종 4)에 건립된 것으로 우선 규모면에서 다른 비석과 차별성을 지니고 있다. 아울러 각부의 양식에서 귀부는 다른 예와는 달리 귀갑문 대...

붉은 배롱나무꽃이 매혹적인 담양 명옥헌 원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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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 명옥헌 원림 정보 조선 중기 오희도(吳希道:1583~1623)가 자연을 벗삼아 살던 곳으로 그의 아들 오이정(吳以井:1574∼1615)이 명옥헌(鳴玉軒)을 짓고 건물 앞뒤에는 네모난 연못을 파고 주위에 꽃나무를 심어 아름답게 가꾸었던 정원이다. 소쇄원(瀟灑園)과 같은 아름다운 민간 정원으로 꼽힌다. 명옥헌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아담한 정자이다. 교육을 하기 위한 적절한 형태로 건물이 지어져 있다. 건물을 오른쪽으로 끼고 돌아 개울을 타고 오르면 조그마한 바위 벽면에 ‘명옥헌 계축(鳴玉軒癸丑)’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건물 뒤의 연못 주위에는 배롱나무가 있으며 오른편에는 소나무 군락이 있다. 명옥헌 뒤에는 이 지방의 이름난 선비들을 제사지내던 도장사(道藏祠)의 터가 남아 있다. 우리나라의 옛 연못이 모두 원형이 아니라 네모 형태를 한 것은 세상이 네모지다고 여긴 선조들의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계곡의 물을 받아 연못을 꾸미고 주변을 조성한 솜씨가 자연을 거스리지 않고 그대로 담아낸 조상들의 소담한 마음을 그대로 반영하였다. 소쇄원이 그러하듯이 이 명옥헌의 물소리도 구슬이 부딪쳐 나는 소리와 같다고 여겨, 명옥헌이라고 하였다. 건물에는 명옥헌 계축이라는 현판과 더불어 삼고(三顧)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명옥헌의 오른편에는 후산리 은행나무 또는 인조대왕 계마행(仁祖大王 繫馬杏)이라 불리는 은행나무가 있다. 300년 이상된 노거수로 인조가 왕이 되기 전에 전국을 돌아보다가 오희도를 찾아 이곳에 왔을 때 타고온 말을 매둔 곳이라 해서 이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평창 흥정천의 명승지, 팔석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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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팔석정 정보 양사언이 강릉부사로 재임시 영동지방을 두로 살핀 후 자연경치에 탄복하여 영서지방에는 이만큼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 없겠다는 생각에서 영서지방의 여러곳을 다니던 중 이곳 봉평면(당시는 이 지방이 강릉부 소속에 이르렀다) 아담하면서도 수려한 경치에 이끌려 정사도 잊은채 8일을 신선처럼 노닐며 경치를 즐기다가 팔석정(八石亭)이란 정자를 세우게 하고 1년에 세 번씩 춘화(春花), 하방(夏芳), 추국(秋菊)을 찾아와 사상을 가다듬었다. 그는 임기가 끝나 고성부사로 전임하게 되자 다시 이곳에 찾아와 정자를 관리하기 위하여 집 한 채를 세운 후 샘이 깊은 우물을 파놓고(봉래고정이라 함) 주변의 바위 여덟 군대에 봉래(蓬來), 방장(方丈), 영주(瀛州), 석대투간(石臺投竿), 석지청련(石池淸蓮), 석실한수(石室閑睡), 석요도약(石謠跳躍), 석평위기(石坪圍棋)라는 글을 새겨 놓았다.

슬픈 역사를 간직한 단종의 유배지인 영월 청령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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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 청령포 정보 청령포는 강원 영월군 남면 광천리 남한강 상류에 위치한 곳으로, 세조 3년(1457년) 세조에 의해 노산군으로 강봉된 단종의 유배지로 2008년 12월 국가지정 명승 제50호로 지정이 되었는데요. 유배되던 해 여름, 홍수가 염려되어 처소를 영월 객사인 관풍헌으로 옮기기 전까지 단종이 머물던 곳입니다. 서쪽은 험준한 암벽이 솟아 있고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섬과 같은 곳으로 단종이 한양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다고 전하는 망향탑 돌무더기, 노산대 등 슬픈 역사가 남아 있습니다. 영조 2년(1726년)에는 단종의 유배지를 보호하고자 일반인이 출입하지 못하게 금표비를 세웠고, 영조 39년(1763년)에는 영조가 친필로 '단묘재본부시유지'라는 비문을 써서 단종이 살던 집터에 비와 비각을 세웠습니다. 4월에는 단종이 머물던 곳에 앞면 5칸, 옆면 2칸 반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 형식으로 기와집을 복원하였고, 부속건물로 초가집을 세웠습니다. 천연기념물인 관음송을 비롯하여 단종의 어가 주변에 있는 크고 오래된 소나무 숲이 서강과 어우러져 자연 경관이 뛰어난 명승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