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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 동산, 작성산과 청풍문화유산단지 한벽루

제천 동산, 작성산과 청풍문화유산단지 한벽루 정보

동산-작성산-한벽루

동산은 충북 제천시 금성면과 청풍면, 단양군 적성명에 걸쳐 있는 산이다(고도 : 896m). 동산을 대표하는 바위는 남근석으로 건녀편의 작은 동산 자락 계곡에는 여근석이 놓여 있다. 동산의 산행 코스는 무암사 입구에서 시작하여 남근석 능선의 험한 암릉길과 성봉, 중봉을 거쳐 동산 정상을 다녀온 후 새목재에서 바로 하산을 하거나, 새목재에서 작성산, 쇠뿔바위를 경유해 무암사 입구로 내려와도 된다.

작성산은 충남 단양군의 적성면과 제천시 금성면에 걸쳐 있는 산이다(고도: 848m). 금수산의 북단에 위치하며 이웃에 있는 동산(東山, 896m)과 더불어 여름산으로 유명한 곳이다. 『대동여지도』에는 단양군의 서면과 청풍군의 덕산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표기되어 있다. 『조선지지자료』에는 단양군 적성면에 있는 산(840m)으로 수록되어 있다. 대부분의 지도에는 작성산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주민들이나 등산객들 대부분은  까치성산으로 부른다고 한다. 흔히 금수산에 배바위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까치성산에 있다. 작성산 아래에 있는 금성면 성내리 동북쪽 골짜기 무암골에는천년고찰 무암사가 있다. 통일신라 때 의상대사가 무암사를 세우려고 아름드리 나무를 잘라 힘겹게 나르고 있을 때 어디선가 소 한 마리가 나타나 목재를 운반하여 준덕에 손쉽게 절을세웠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제천 청풍 한벽루(堤川 淸風 寒碧樓, 보물)는 청풍 관아에 딸린 건물로, 고려 축숭왕 4년(1317)에 청풍현 출신 승려 청공이 왕의 스승인 왕사가 되면서 청풍현이 청풍군으로 승격된 것을 기념하고자 세운 누각이다. 본채 옆에 작은 부속채가 딸려 있는 형태로, 밀양 영남루(보물), 남원 광한루(보물)와 함께 조선 시대 누각 건축 양식을 잘 보여 주는 건물로 꼽힌다. 한벽루에서 보는 경치가 매우 빼어나서 조선 시대의 많은 문인과 화가들이 한벽루를 주제로 한시와 그림들을 여러 편 남겼다. 1972년 8월에 대홍수로 건물이 무너지고 현판들도 모두 떠내려가서 1975년에 본래 모습대로 다시 지었다. 원래는 청풍면 읍리에 있었으나 충주댐을 만들면서 마을이 물에 잠기자 청풍문화유산단지로 옮겼고, 송시열이 쓴 현판은 사진을 보고 다시 만들었다.

*누각(樓閣): 사방을 바라볼 수 있도록 문과 벽이 없이 다락처럼 높이 지은 집

제천 청풍문화유산단지 한벽루

제천 청풍 한벽루 정보

청풍문화유산단지-한벽루

제천 청풍 한벽루(堤川 淸風 寒碧樓, 보물)는 청풍 관아에 딸린 건물로, 고려 축숭왕 4년(1317)에 청풍현 출신 승려 청공이 왕의 스승인 왕사가 되면서 청풍현이 청풍군으로 승격된 것을 기념하고자 세운 누각이다. 본채 옆에 작은 부속채가 딸려 있는 형태로, 밀양 영남루(보물), 남원 광한루(보물)와 함께 조선 시대 누각 건축 양식을 잘 보여 주는 건물로 꼽힌다. 한벽루에서 보는 경치가 매우 빼어나서 조선 시대의 많은 문인과 화가들이 한벽루를 주제로 한시와 그림들을 여러 편 남겼다. 1972년 8월에 대홍수로 건물이 무너지고 현판들도 모두 떠내려가서 1975년에 본래 모습대로 다시 지었다. 원래는 청풍면 읍리에 있었으나 충주댐을 만들면서 마을이 물에 잠기자 청풍문화유산단지로 옮겼고, 송시열이 쓴 현판은 사진을 보고 다시 만들었다.

*누각(樓閣): 사방을 바라볼 수 있도록 문과 벽이 없이 다락처럼 높이 지은 집

언양 화장산과 언양읍성,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 운문사

언양 화장산과 언양읍성,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 운문사 정보

화장산-언양읍성-천전리명문과암각화-운문사

화장산은 울산시 울주군의 상북면 향산리와 언양읍 송대리에 걸쳐 있는 산이다(고도:271m). 화장산(花藏山)은 『여지도서』(언양)에 “화장굴(花藏窟)은 화장산 산마루에 있다. 굴 앞에 대(臺)가 있으며, 대 위에 화장암 옛터가 있다. 당시 신라 임금이 병에 걸렸는데, 점쟁이가 하는 말이 복숭아꽃이 신령한 약이라고 했다. 추운 겨울날이라 마승(馬勝)을 찾을 수가 없었다. 징조를 살피는사람이 남쪽 지방에 가면 구할수 있다고 했다. 역마를 타고 가서 찾아보니 이 고장 산 아래에 이르러 동굴 집을 바라보니 그 안에 복숭아나무 한 그루가 있으며 복숭아꽃이 찬란하게 피어 있었다. 그 오두막집에 가서 보니 단지 한 명의 비구니만 보였는데, 비구니가 웃으며 말하기를 ‘복숭아가 바로 저입니다.’하였다. 비구니와 함께 말을 몰아갔다. 임금이 비구니를 보고 크게 기뻐했는데, 임금의 병이 곧장 깨끗이 나았다. 당시 사람들이 이 일을 기이하게 여겨 산의 이름을 ‘복숭아꽃을 간직했다.’라는 뜻에서 화장산이라고 하였다.”라는 기록에서 지명의 유래를 알 수 있다. 『영남읍지』(언양)에는 “화장산(花藏山)은 현 북쪽 2리에 있다. 고헌산에서 떨어져 나온 산 줄기로서 읍터의 주산(主山)을 이룬다. 산 위에 화장굴이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지지자료』에는 상북면 송대리에 있는 화장산과 화장굴을 수록하고 있다. 『해동지도』(언양) 등 군현지도에는 빠짐없이 화장산을 표기하고 있다. 산 중턱에는 화장굴 안에 약수가 있는데, 깨끗하지 못한 사람이 그것을 마시거나 보게 되면 물에서 냄새가 나거나 아예 물이 말라 버렸다고 한다. 현재 이곳에는 화장산 미타굴(彌陀窟, 일명굴암사)이라는 암자가 있다

지방의 행정 및 군사 중심지에 세워졌던 울주 언양읍성은 객사와 동헌을 핵심시설로 각 군현의 주민과 관리를 보호하고 그들이 거주하는 공간이다. 1390년(공양왕 2)에 처음 토성으로 축조된 것을, 1500년(연산군 6)에 현감 이담룡이 석성으로 고쳐 쌓으면서 확장한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성의 둘레는3,064척(약 1,500m), 높이는 13척(6.3m) 이었다. 성벽은 조선 전기 읍성의 일반적인 형태로 하부는 비교적 큰 돌을 세워 쌓거나 눕혀쌓되 성돌 사이의 빈 공간에는 잔돌로 채운 형태이며 상부로 갈수록 작은 돌로 성벽을 쌓았다. 성벽의 4면에는 각각 문을 내었으며, 성문 위에는 정문인 영화루(남문), 망월루(동문) 등의 누각을 두었다. 성벽 모서리에는 보초병이 망을 보던 각루를 세웠고, 성문 주위에는 문을 보호하기 위한 반원형으로 옹성을 쌓았다. 성문과 각루사이에는 총 12개의 치성을 두었다. 치성은 성벽에 기어오르는 적병을 쏘기 위해 성벽에서 바깥쪽으로 돌출시켜 만든 시설이다. 성벽에서 7m 정도 바깥으로는 너비 3~5m 정도의 방어용 도랑인 해자가 있었으며, 해자 바닥에는 목익(뾰족한 꼬챙이)이 촘촘히 박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성 안에는 각종 관아가 있었으며, 동쪽에 동헌이, 서쪽에 객사(구 언양초등학교 자리)가 있었다. 동서남북을 관통하는 도로와 서문을 가로지르는 수로, 그리고 성내에는 4개의 우물이 있었다.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는 태화강의 지류 하천인 반구천(행정 명칭: 대곡천)에 있다. 1970년 12월 24일 동국대학교 박물관 조사단이 울주지역 불교유적을 조사하던 중 마을 주민의 제보로 발견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알려진 암각화이다. 암각화와 명문은 너비 약 9.8m, 높이 약 2.7m 규모의 중심 바위면과 주변 바위면 4곳에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를 거쳐 신라 때까지 오랜 시대에 걸쳐 만들어졌다. 중심 바위면은 약 25도 정도 앞으로 기울어져 있어 비바람으로부터 암각화와 명문을 보호하는 모양이다. 이곳에는 그림 625점이 새겨져 있는데, 한 바위면에 시대별로 일정한 구획을 나누어 배치되어 있다. 바위면의 왼쪽 상단에는 사슴, 물고기와 같은 신석기시대의 그림이 새겨져 있으며, 바위면의 중앙 상단에는 동심원, 마름모, 물결 무늬와 같은 청동기시대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바위면의 하단부에는 행렬, 돛을 단 배, 말과 용 등 산라 때의 그림과 문자가 새겨져 있다. 특히 신라 때의 명문은 고대사 연구에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신라 진흥왕 18년(557)에 한 신승(神僧)이 현재의 북대암 옆 금수동에서 3년간 수도하여 깨달음을 얻은 후 다섯 곳에 절을 창건하였는데, 중앙에 대작갑사(현 운문사), 동쪽에 가슬갑사, 남쪽에 천문갑사, 서쪽에 대비갑사(현 대비사), 북쪽에 소보갑사인 오갑사이다. 600년 신라 원광국사가 중창하였으며, 이때 귀산과 추항 두 화랑에게 세속오계를 전수하였다. 이후 후삼국의 혼란기에 폐허가 된 절을 930년에 보양국사가 크게 중창하였으며, 고려태조 왕건이 통일을 도운 보양국사에 대한 보은으로 937년 운문선사(雲門禪寺)라는 사액을 내리고 전지 500결의 넓은 토지를 하사하였다. 이때분어 운문사라는 명칭으로 부르게 되었다. 고려중기 가지산문의 원응 학일 스님이 주석하면서 나라의 제2선찰(禪刹)이라 할 정도로 사세가 커졌으며, 1277년 일연 스님이 주지로 머물면서 이곳에서 삼국유사의 집필을 시작한 곳이기도 하다. 불교정화 직후인 1955년부터 비구니 사찰이 되어 1958년 비구니 전문강원이 개설되었고, 1977년 이후 명성 스님이 주지로서 도량의 면모를 크게 일신시켜 현재 승가대학과 대학원, 율원과 선원을 갖춘 전국 최대 규모의 비구니교육 도량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청도 운문사 처진소나무

청도 운문사 정보

청도-운문사

신라 진흥왕 18년(557)에 한 신승(神僧)이 현재의 북대암 옆 금수동에서 3년간 수도하여 깨달음을 얻은 후 다섯 곳에 절을 창건하였는데, 중앙에 대작갑사(현 운문사), 동쪽에 가슬갑사, 남쪽에 천문갑사, 서쪽에 대비갑사(현 대비사), 북쪽에 소보갑사인 오갑사이다. 600년 신라 원광국사가 중창하였으며, 이때 귀산과 추항 두 화랑에게 세속오계를 전수하였다. 이후 후삼국의 혼란기에 폐허가 된 절을 930년에 보양국사가 크게 중창하였으며, 고려태조 왕건이 통일을 도운 보양국사에 대한 보은으로 937년 운문선사(雲門禪寺)라는 사액을 내리고 전지 500결의 넓은 토지를 하사하였다. 이때분어 운문사라는 명칭으로 부르게 되었다. 고려중기 가지산문의 원응 학일 스님이 주석하면서 나라의 제2선찰(禪刹)이라 할 정도로 사세가 커졌으며, 1277년 일연 스님이 주지로 머물면서 이곳에서 삼국유사의 집필을 시작한 곳이기도 하다. 불교정화 직후인 1955년부터 비구니 사찰이 되어 1958년 비구니 전문강원이 개설되었고, 1977년 이후 명성 스님이 주지로서 도량의 면모를 크게 일신시켜 현재 승가대학과 대학원, 율원과 선원을 갖춘 전국 최대 규모의 비구니교육 도량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울주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 및 천전리 공룡발자국 화석

울주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 및 천전리 공룡발자국 화석 정보

울주-천전리-명문과-암각화-공룡발자국-화석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는 태화강의 지류 하천인 반구천(행정 명칭: 대곡천)에 있다. 1970년 12월 24일 동국대학교 박물관 조사단이 울주지역 불교유적을 조사하던 중 마을 주민의 제보로 발견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알려진 암각화이다. 암각화와 명문은 너비 약 9.8m, 높이 약 2.7m 규모의 중심 바위면과 주변 바위면 4곳에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를 거쳐 신라 때까지 오랜 시대에 걸쳐 만들어졌다. 중심 바위면은 약 25도 정도 앞으로 기울어져 있어 비바람으로부터 암각화와 명문을 보호하는 모양이다. 이곳에는 그림 625점이 새겨져 있는데, 한 바위면에 시대별로 일정한 구획을 나누어 배치되어 있다. 바위면의 왼쪽 상단에는 사슴, 물고기와 같은 신석기시대의 그림이 새겨져 있으며, 바위면의 중앙 상단에는 동심원, 마름모, 물결 무늬와 같은 청동기시대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바위면의 하단부에는 행렬, 돛을 단 배, 말과 용 등 산라 때의 그림과 문자가 새겨져 있다. 특히 신라 때의 명문은 고대사 연구에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대곡리 천전리 각석 주변에는 공룡 발자국 화석이 있다. 약 1억년 전 백악기 시대에 살았던 중생대 중,대형 공룡들의 발자국이 약 1,750m²넓이의 바위에 새겨져 있는데, 대형 초식 공룡인 한외룡(울트라사우르스)과 중형 초식 공룡인 고성룡(고성고사우르스) 발자국 등 200여 점이 남아 있다. 한편, 천전리각석 일원에서는 모바일 앱을 통해 전기 백악기시대에 천전리 일대 및 한반도에 서식했던 22종의 공룡 모습을 증강현실(AR)로 체험하고 공룡과 함게 사진 촬영할 수 있다. 천전리, 대곡리 공룡발자국 화석은 울산 문화재자료 제6호 및 제13호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