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철원역사문화공원
철원역사문화공원은 철원 근대사회의 태동과 발전, 쇠퇴라는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지역주민의 역사적 기록과 고증을 통해 건립한 공간입니다. 철원의 근대화는 일제 주도로 경원선 철도와 금강산전기철도의 부설, 철원평야의 개척 등으로 시작하였으며, 그로 인해 광복 이전 철원은 인구 10만명이 넘는 강원도 중심도시로 성장하였고, 시가지에는 관공서, 학교, 위락업소, 문화시설 등 많은 시설이 건립되어 운영되었던 곳입니다. 다만, 광복 후 남북의 분단과 한국전쟁으로 번성했던 철원읍 시가지는 폐허가 되고 농경지로 변했으며,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 가고 있습니다. 이곳 철원역사문화공원에서 일제의 억압과 핍박으로 일군 가슴아픈 근대 역사를 기억하며, 다양한 문화를 체험하고 밝은 미래로 나아가는 계기를 만들어 가시길 희망합니다.
2. 노동당사
철원 노동당사는 1946년에 북한 노동당이 철원과 그 인근 지역을 관장하기 위해 지은 건물입니다. 지역 주민의 노동력과 자금을 강제로 동원하여 지였으며, 주민을 통제하고 사상운동을 억합하는 구실을 하였습니다. 이곳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모든 건물이 파괴되었지만 철근 구조에 벽돌과 시멘트로 벽을 쌓아 매우 견고하게 지어진 건물인 노동당사는 현재의 모습으로 남아 분단과 전쟁의 참상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철원역사문화공원과 노동당사 여행 일자 및 여행코스
1. 여행 일자 : 2025년 10월 17일 금요일
2. 여행 장소 : 철원역사문화공원과 노동당사
3. 소재지 :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 철원읍 사요리 366-1(철원역사문화공원),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 철원읍 금강산로 265(노동당사)
4. 여행 코스 : 철원역사문화공원주차장 → 화장실, 태봉열차 매표소 → 종합안내소 → 철원양장점, 철원금융조합 → 도시빈민의 주택, 평범한 사람들의 주택, 신흥부자들이 살았던 주택 → 철원약국, 강원도립철원의원, 철원공립보통학교 → 철원 떡전 거리 장터 → 철원우편국, 철원소방조기구치장, 관동여관/일출여관 → 철원역, 철원극장, 오정포 → 철원역사문화전시관 → 해시계광장, 철원독립운동거리 → 노동당사
철원역사문화공원과 노동당사 다음지도 및 대중교통편
1. 철원역사문화공원 다음지도
2. 대중교통편 : 철원역사문화공원의 교통편에 대한 정보는 다음지도 철원역사문화공원 길찾기를 이용하세요.
철원역사문화공원과 노동당사 여행기 및 사진
1. 철원역사문화공원주차장
▲ DMZ 평화의 길 15코스 트레킹 중에 철원역사문화공원을 둘러보았는데요. 왼쪽 주차장 방향으로 들어갑니다. 단, 철원역사문화공원주차장에 자동차를 주차하시는 분은 현재 위치보다 남쪽에서 진입해야 합니다.
▲ 철원역사문화공원주차장입니다. 오른쪽 건물은 태봉열차 매표소입니다.
2. 화장실, 태봉열차 매표소
▲ 철원역사문화공원의 화장실(左)과 태봉열차 매표소(右)인데요. 태봉열차를 이용하시는 분들은 매표소에서 표를 구입후 타실 수 있고, 철원역사문화공원 관람은 무료입니다. 참고로 태봉열차는 철원역사문화공원에서 태봉국 궁예왕 역사공원까지 운영하며 성인 이용료는 7,000원(상품권 환급 3,000원)입니다.
3. 종합안내소
▲ 철원역사문화공원 종합안내소
▲ 종합안내소와 화장실 사잇길로 들어가면 오른쪽 방면은 상점가(이마트24 등)이고 왼쪽으로 공원 내 주요시설이 배치되어 있는데요. 왼쪽으로 철원양장점과 철원금융조합이 있습니다.
4. 철원양장점, 철원금융조합
▲ 멋쟁이들의 철원양장점
1920년대 중반에서 1930년대 중반 사이, 식민지였던 서울의 대중문화와 소비문화에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런 변화의 주체는 일제 강점 이후에 태어나 일본을 통해 들어온 서양의 근대문화의 영향 아래 성장한 청년 계층으로 사람들은 "모던보이", "모던걸"이라고 불렀습니다. 새로운 서양식 의상과 두발, 언어, 의식 등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었던 이들 모던보이, 모던걸들은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기 위하여 패션에서 차별점을 두기 시작하였으며, 그 결과 서양식 의상을 만드는 양장점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철원 역시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서울에서 볼 수 있는 양장점이 문을 열었고, 이곳을 통해 철원의 새로운 패션 유행이 탄생했습니다.
▲ 일제의 철원 수탈을 위해 설립한 근대적 금융기관인 철원금융조합
5. 도시빈민의 주택, 평범한 사람들의 주택, 신흥부자들이 살았던 주택
▲ 도시빈민의 주택(토막집, 움집)
일제강점기시대에는 살기 힘든 농촌을 떠난 농민들이 도시로 몰려들면서 도시에는 새로운 사회계층이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들을 가리켜 "토막민"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이 살았던 주거형태가 바로 토막(토막집, 움막)으로 주로 산기슭, 하천변, 다리 밑 등에 흙굴을 파서 그 위에 멍석을 깔고 주위에 짚을 펴서 만들었습니다. 사람이 살기 위한 최소한의 주거 요건만을 갖춘 한 칸짜리 방으로 구성된 토막은 일제강점기시대에 등장하여 당시 번성하였던 도시의 외곽지역에 형성되었으며, 경원선과 금강산 관광, 철원평야 등으로 강원도의 주요 도시로 성장했던 철원의 외곽지역에서도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 평범한 사람들의 주택(초가집)
갈대나 새, 볏집 등으로 지붕을 인 집인 초가집은 일반인들이 가장 많이 살았던 우리민족의 전통주택 중 하나입니다. 초가집은 지붕의 재료가 가벼워 구조체가 굵지 않아도 되고 단열도 잘되기 때문에 여름에 더운 기운을 차단해서 시원하고 겨울에는 차가운 기운을 막아 온기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지역에 따라 초가집의 형태도 약간씩은 다른 형태를 띠고 있는데, 강원도 지역의 초가집은 "ㄱ"자 모양을 갖춘 형태입니다. 안방과 건넌방 사이에 마루를 둔 형태인 강원지역의 초가집은 북부지방보다는 따뜻하고 남부지방보다는 춥기 때문에 마루가 좁고 창문이 적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 신흥부자들이 살았던 주택(근대 기와집)
근대의 기와집은 전통적인 기와집과 달리 서양식 응접실이나 주방 등이 내부에서 연결되어 불편함이 줄어진 형태로 만들어졌습니다. 철원에는 일본인과 함께 조선인 자본가들이 많이 살고 있었기에 일본인들은 일본식 건물에서, 조선인 자본가들은 오래된 기와집을 서양식으로 고쳐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조선인 자본가들이 살았던 근대 기와집은 사랑채와 건넌방이 복도도 연결되기도 하였고, 욕실이나 변소 등이 내부에 설치되는 등 전통적인 기와집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현관과 함께 유리문이 사용되어 이전 시기의 기와집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6. 철원약국, 강원도립철원의원, 철원공립보통학교
▲ 철원약국과 강원도립철원의원
▲ 양약국의 등장(철원약국)
서양의학이 도입된 후 1880년대 후반 생긴 "양약국"은 이후 전통적인 약방을 대처하면서 전국에 보급되기 사작하였습니다. 초기에는 양약뿐만 아니라 한약도 함께 판매하였으나, 서양의학에 대한 이해도가 대중에게도 점차 높아지고, 정규 의학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면서 양약국에 대한 숫자도 늘어나게 됩니다. 이러한 양약국이 철원지역에 정확하게 언제부터 문을 열게 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다만, 1931년 강원도립 철원의원이 개원했을 때 직원 구성원으로 약제수가 임명된 것으로 보아 철원의원 개원 이후에는 근대적 의미의 서양식 약국이 운영되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 서양의학의 시작(강원도립철원의원)
조선이 문호를 개방하면서 본격적으로 들어온 서양의학은 선교사들에 의해 전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다만 철원지역은 서양의학의 도입이나 발전이 지리적인 특성 등으로 다른 지역보다는 늦게 보급되었습니다. 철원의 서양의학은 1920년 철원제일교회가 설립되고 선교사 주재소 건립과 함께 앤더스 선교사가 철원지역 담임 의료선교사로 부임하고 구세의원을 설립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철원지역주민과 황해도지사 및 황해경찰 부장 등 합의하여 도립의원 건립을 위한 노력을 통해 1931년 강원도립철원의원이 개원되었습니다.
▲ 철원공립보통학교
1899년 철원군공립소학교로 개교(광무 3년)하였습니다. 1906년에 철원공립보통학교로 개칭하였고 수업연한은 4년이었습니다. 또한, 광복 당시 6년 과정 24학급 2,600여명의 학생이 등교하였으며, 한국전쟁으로 학교 수업은 중단되고 건물은 전소되어 터만 남아 있습니다.
▲ 철원공립보통학교 교실
7. 철원 떡전 거리 장터
▲ 철원 떡전 거리 장터
8. 철원우편국, 철원소방조기구치장, 관동여관/일출여관
▲ 개화기 당시 신문물이 오가던 철원 우편국과 일제강점기 근대적 소방제도가 시행된 철원소방조기구치장(철원소방서)
▲ 금강산 관광을 위해 철원에 머무는 사람이 이용한 숙박시설인 관동여관
▲ 금강산 관광을 위해 철원에 머무는 사람이 이용한 숙박시설인 일출여관
9. 철원역, 철원극장, 오정포
▲ 철원 경제 발전의 원동력(철원역, 소이산 모노레일 탑승장)
철원평야 한가운데 위치한 철원역은 1912년 서울과 원산을 잇는 경원선의 연천-철원간 개통으로 문을 열었으며, 1931년 금강산전기철도의 개통과 함께 철원지역의 발전을 이끄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경원선을 통해 서울 용산에서 철원역까지 2시간, 철원역에서 내금강까지 4시간 반이 걸리게 되면서 철원은 강원 북북의 교통, 물류, 산업의 중심지가 되어 춘천, 원주와 더불어 강원도의 3대 도시의 위상을 갖춘 지역으로 급성장하였습니다. 1937년 발행된 '철원군지'에 따르면 승하차 인원 약 28만명, 수하물 약 6만 3천톤 가량이 철원역을 통해 운송되었다고 하며, 역무원도 80여 명이 근무하였다고 합니다.
▲ 신 문화의 전당이자 강원도 문화예술의 산실인 '철원극장'과 정오에 포를 쏘아 시간을 알려주던 시설인 '오정포'
경원선과 금강산 전기철도의 개통으로 철원지역이 강원 북부의 중심지가 되면서 도시인구가 급증하고 공연문화 수요가 늘어나면서 1934년 최초의 근대식 극장인 철원극장이 문을 열게 되었습니다. 철원극장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최고의 문화 예술인들이 공연을 펼쳤던 곳으로 당내 최고의 무용가였던 최승희를 비롯하여 배뱅이굿의 명창 이은관이 데뷔한 곳이기도 하며, 다양한 가수와 연극인들의 공연장이기도 했습니다. 공연이외에도 무성영화 관람이 가능하였고, 1939년 개축을 통해 지방극장으로는 드물게 전문 공연장의 면모를 갖춘 문화시설로 거듭났으며, 북조선 순회공연의 마지막 여정지였습니다.
▲ 역전식당과 복도다방
▲ 철원역사문화전시관으로 올라가는 길
10. 철원역사문화전시관
▲ 철원의 역사와 문화를 전시하는 슬로프형 전시관인 철원역사문화전시관
▲ 철원역사문화전시관 내부의 모습

▲ 철원역사문화전시관 주변을 오르내리는 소이산 모노레일
11. 해시계광장, 철원독립운동거리
▲ 유구한 철원의 역사와 한국전쟁 이후 정체된 철원의 시간을 표현한 해시계광장(左)과 철원독립운동거리(中)
▲ 철원독립운동거리
철원은 강원도 제일의 항일운동 도시였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보개산 줄기를 중심으로 연기우, 홍범도 장군 등이 의병을 이끌고 사생투쟁을 벌였으며, 3·1만세 운동이 벌어졌을 때는 한강 이북에서 가장 먼저 태극기를 들고 우리 산천이 감격하도록 만세를 외쳤었다. 만세운동은 화천, 통천, 이천, 춘천 등지로 번져나갔고, 그 항일정신은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곳 철원역사문화공원을 지켜보고 있는 철원역과 철원군청 터, 철원제일교회, 철원보통학교터, 철원사립봉명학교터 등은 목숨을 걸고 대한독립 투쟁에 나섰던 이름 없는 사람들의 뜨거운 숨결이 남아 있는 소중한 역사의 현장이다. 또한 독립투쟁 역사에서 별처럼 빛나는 우성 박용만 선생, 자신의 전 재산을 바쳐 독립운동에 나섰던 소몽 이봉하 선생, 대한민국 제10대, 11대 광복회장을 지낸 청뢰 이강훈 선생 등의 조국 사랑 혼이 배어있는 곳이기도 하다. 여기 철원독립운동거리는 일제가 겨누고 있던 총검 앞으로 당당히 달려 나갔던 철원의 학생과 청년, 농민, 상인, 종교인 등 모두가 한마음이었던 대한독립 정신을 기리고 후손과 관광객들에게 똑똑히 알리기 위해 조성하였다. 이 거리에 기록한 과거의 항일운동 투쟁정신이 미래에는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의 길로 안내하는 이정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12. 노동당사
▲ 철원역사문화공원 관람을 마치고 맞은편에 있는 노동당사로 왔는데요. 북한의 노동당사는 1946년 초에 북한정권하에서 착공한 지상 3층에 연건평 580평 규모로 신축된 건물로 지역주민들의 강제동원과 모금에 의해 지어진 건축물이라고 합니다.
▲ 노동당사 건물 뒷편의 모습

▲ 오늘은 철원역사문화공원과 노동당사를 소개해드렸는데요. 철원역사문화공원과 노동당사를 찾으신 모든 분들이 좋은 추억을 쌓으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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