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돌산도 봉황산, 금오산

봉황산, 금오산 정보

봉황산

1. 봉황산

돌산도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봉황산은 해발 460m로 돌산읍 율림리, 서덕리, 죽포리에 걸쳐 있으며 예로부터 봉황이 산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상산으로도 불린다. 정상을 중심으로 등산로가 잘 발달되어 있으며 특히 주변의 아름다운 바다를 조망하며 산행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최적의 등산코스로 봉황산에서 남동으로 흘러가는 산릉을 따라 섬 최남단 끝머리에 위치한 아름다운 기암 덩어리인 금오산(향일암)과 연결하여 일출과 일몰을 볼 수 있는 산이다.

2. 금오산

금오산(金鰲山, Geumosan)은 여수시의 돌산읍 율림리와 금성리 일대에 위치한 산이다(고도:323m). 돌산도 남동쪽 해안에 자리잡고 있으며 북서쪽을 제외하고 급경사의 암석 해안과 이어진다. 우리나라 4대 관음 기도처 중의 하나인 향일암(도 지방문화재 제40호)이 있다. 금오산에 대한 기록은 구한말에 등장하는데『돌산군읍지』에 돌산도의 팔대산 중에 금오산이 있으며, “금오산은 군의 동쪽 20리에 있다. 산이 모두 흰 돌이며 거북이 모양으로 (중략) 소금강(小金剛)이라칭한다.”고 하였다. 『조선지지자료』(돌산)에 율림리에 있는 산으로 기재되어 있다.『1872년지방지도』(순천방답진)에 지명은 보이지 않으나 향일암과 함께 산으로 묘사된 지역에 “진(鎭)으로부터 45리”라는 표기가 있다. 『돌산군읍지』의 지도에는 돌산군 동남단에 암석산으로 금오산이있으며 향일암을 함께 표기했다. 금오산이 거북이 모양이므로 지명이 유래했다고 전하며 풍수지리상 금오산 향일암은 경전을 등에 모신 금거북이가 바다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이라고 한다.

백마고지와 김일성고지를 조망할 수 있는 철원 소이산전망대

철원 소이산 정보

소이산
소이산은 평야에 우뚝솟은 362m의 작은 산으로 때묻지 않은 자연과 넓은 평야를 내려다 보는 정상 전망은 그 위용을 자랑한다. 고려시대부터 외적의 출연을 알리던 제 1로 봉수대가 위치한 공간으로 한국전쟁 이전 화려했던 구 철원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을 철원역사의 중심이다.

기도성지 목정굴로 유명한 금선사

금선사 정보

금선사-대적광전

금선사는 고려와 조선이 왕조교체기 때 무학(無學)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알려져 있다. 무학대사는 조선의 도읍을 정하고자 삼각산을 살피던 중, 지금의 금선사 터에 삼각산의 정기가 서려있고, 부처님이 상주하시며 중생들을 제도하는 형상과 같다고 하여 절을 짓고, 금선(金仙:금빛의 신선 즉, 부처)사라고 하였다. 조선시대에 목정굴이 관음기도성지로 알려졌다. 또한 금선사 농산스님이 정조의 왕세자인 순조로 환생하였다는 설화도 전해지는데, 이를 계기로 1791년 정조의 명으로 원찰이 되기도 하였다. 설화에 의하면 금선사의 농산스님은 조선후기 사찰에 가해지는 각종 국역에 의해 피폐해지는 불교를 구해낸 인물로 묘사되어 있어 사찰의 규모는 작아도 위상은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더불어 금선사는 조선후기 사대부 문인들(신정하, 조수삼, 박규수 등)과 스님들이 활발하게 교유한 장으로도 가능하였다. 특히 추사 김정희의 아우 김명희와 초의스님과는 교유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처럼 창건 이래로 신령한 기운과 문학이 숨쉬는 명찰로 법등을 잇다가 일제강점기에 관리소홀로 인하여 퇴락하게 되었다. 이후 1957년에 이를 안타깝게 여긴 도공 스님이 옛터에 중건하고, 법안 스님이 주석하며 1996년에 목정굴을 복원한 것을 필두로 대적광전, 삼성각, 반야전, 미타전, 설선당, 적묵당, 범종루 등의 각 전각과 요사를 신증축하여 현재 가람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서울 북한산 : 신도중학교 정류장 ~ 기자능선 ~ 향로봉 ~ 금선사 ~ 이북5도청 정류장

북한산과 기자능선 정보

기자능선

북한산(北漢山 Bukhansan)은 서울시의 성북구·종로구·은평구·강북구와 경기도 고양시에 걸쳐 위치한 산이다(고도:836m). 본래 한산(漢山)이라 불렸는데 ‘큰 산’이라는 뜻의‘산’을 한자로 차음 하여 표기한 것이다. 한산이란 이름은『삼국사기』,『고려사』, 『세종실록지리지』등에 보이며, 서울 지방의 옛 이름을 한산·북한산·북한산성·북한성·한양 등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북한산은 처음에는 산 이름이 아니라 서울의 옛 이름인 한산의 북쪽 지역을 가리키는 지명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한성부에는 “양주 지경에 있다. 화산(華山)이라고도 하며, 신라 때에는 부아악(負兒岳)이라고 하였다. 평강현(平康縣)의 분수령(分水嶺)에서 잇닿은 봉우리와 겹겹한 산봉우리가 높고 낮음이 있다. 또 삼각산이 되니, 실은 경성(京城)의 진산(鎭山)이다. 고구려 동명왕의 아들 비류, 온조가 남쪽으로 나와서,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가 살 만한 땅을 찾았으니, 바로 이 산이다.”라고 하여 여러 다른 이름들이 보인다. 부아악은 어머니가 어린애를 업고 있는 형상을 한자명으로 표기한 것으로 해석된다. 부아가 불의 표기이므로 부아 → 불 → 화(火) → 화(華)로 바뀌어 화산이 되었다는 해석도 있다. 그러나 화산·화악은 세 봉우리가 연꽃이 핀 것과 비슷하다 하여 연화산(蓮華山)의 준말로 쓴 것으로 볼 수도 있다.『고려사』의 삼각산 승가굴의 기록이나,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북한지』에 따르면 삼각산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일반화된 이름이다. 삼각산은 인수봉·백운봉·만경봉 세 봉우리가 삼각을 이루어 나란히 있는 모습 때문에 유래되었는데, 근래에까지 삼각산이란 이름이 일반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조선 후기 북한산성이 축성된 내용을 기록한 『북한지』가 출간된 이후 북한산이란 이름이 자연스럽게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세 봉우리 중 가장 높은 백운봉과 동쪽 인수봉(811m)은 온통 바위로 이루어졌다. 동남쪽에 솟은 만경대(801m)는 일명 국망봉(國望峰)으로, 이곳에 올라서면 만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바위라는 뜻으로 붙은 이름이다. 만경대 서남쪽에는 임진왜란 때 왜적들이 노적더미로 의심하였다는 노적봉(718m)과 진흥왕순수비가 있어 이름 붙여진 비봉(527m)이 있다.
 
기자능선은 기자촌에서 시작하여 대머리바위, 발가락바위, 기자봉, 진관봉 등을 거쳐 향로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말합니다. 현재는 사라진 마을인 기자촌은 서울시 은평구 진관외동 175번지 일대에 거주하던 기자들의 집단거주 마을이었다고 합니다. 

마음의 달이 아름다운 절, 월정사

월정사 정보

월정사

월정사(Woljeongsa, 月精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로 신라 선덕여왕 12년(643)에 지장율사에 의해 창건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는 천년의 역사를 지닌 사찰입니다. 월정사 8각 9층 석탑, 목조문수동자좌상, 상원사중창권선문, 상원사 동종 등 많은 문화재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