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 보석사 정보
보석사(寶石寺, Boseoksa)는 신라 헌강왕 11년(885)에 조구선사가 창건하였다. 창건 당시 절 앞에서 캐낸 금으로 불상을 만들었기 때문에 절 이름을 보석사라고 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타 없어진 것을 조선 고종 19년(1882)에 명성황후가 다시 세웠다. 보석사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다포식 맞배지붕 건물로 고풍스런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석가여래불과 좌우 협시보살로 이루어진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이 모셔져 있다.
금산 보석사 여행 일자 및 여행코스
1. 여행 일자 : 2025년 11월 18일 화요일
2. 산행 및 여행 장소 : 선야산 + 진악산 + 보석사
3. 소재지 : 충남 금산군 남이면 보석사1길 30(보석사)
4. 사찰 관람 코스 : 금산 보석사 은행나무 → 반야문 → 산신각, 조사전, 대웅전 → 적묵당, 의선각, 불이문, 범종루(해탈문) → 지장전 → 의병승장비 → 보석사 일주문 → 보석사주차장
금산 보석사 다음지도 및 대중교통편
1. 금산 보석사 다음지도
2. 대중교통편 : 금산 보석사의 교통편에 대한 정보는 다음지도 보석사 길찾기를 이용하세요.
금선 보석사 여행기 및 사진
1. 금산 보석사 은행나무
▲ 금산 진악산 산행 하산길에 보석사(↓영천암 0.8km, 보석사 경내 ↑, 주차장 0.3km →)에 들렸는데요. 오늘은 보석사를 자세히 소개해드립니다.
▲ 금산 보석사 은행나무
금산 보석사 은행나무는 높이가 34m이고, 가슴 높이 둘레가 10.72m이며, 가지의 길이는 동서쪽으로 24m, 남북쪽으로 20.7m에 달하는 1,000년 이상 된 나무이다. 줄기의 주축이 높이 올라간 점이며 뿌리 부분에 새로 돋아난 싹이 수없이 많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이 나무는 조구대사가 885년(신라 한강왕 11)에 보석사를 처음 세울 무렵 제자들과 함께 심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나라와 마을에 큰일이 생기면 소리를 내어 위험을 알려 주었다고 한다. 실제로 1945년 광복 때와 1950년 전란 때, 1992년 극심한 가뭄 때 소리를 내어 운 적이 있다. 마을 주민들은 지금까지도 이 나무가 마을을 지킨다고 믿고 있다. 금산 보석사의 은행나무는 오랜 세월 이곳 마을 주민들의 삶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나무로 민속적·생물학적 자료로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되고 있다.
2. 반야문
▲ 반야문(般若門)을 통해 보석사 경내로 들어갑니다.
▲ 보석사 경내로 들어왔는데요. 현재 위치에서 왼쪽으로 산신각·조사전·대웅전과 지장전, 오른쪽으로는 적묵당, 불이문, 의선각, 범종루(해탈문)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3. 산신각, 조사전, 대웅전
▲ 보석사 산신각(山神閣)과 조사전(祖師殿)
▲ 조사전과 대웅전
▲ 산신각, 조사전과 대웅전(大雄殿,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43호)
보석사 대웅전에 모셔져 있는 석가모니불과 좌우의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좌상은 불상의 조각 수법이 섬세하고 아름다워 조선시대 불상 가운데 최고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보석사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14호이다. 대웅전은 다포식의 맞배지붕 건물로 네모나게 다듬은 사괴석을 쌓아 만든 기단 위에 자연석 주출돌을 놓고 그 위에 배흘림기둥을 세워 단아하고 소박한 멋이 있다. 대웅전의 문은 모두 띠살문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정면의 가운데에 있는 어간(御間)은 문짝이 4개 달려 있어서 사분할 띠살문, 정명의 양 옆에 있는 협간(夾間)은 문짝이 3개 달려 있어서 삼분할 띠살문이라고 한다. 양 측면에는 문짝이 1개 달려 있어서 띠살홑문이라고 한다. 지붕 양옆에는 바람과 비를 막기 위해 풍판을 달았다.
※ 다포식 :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과 기둥 사이에 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는 기둥머리 장식을 배치한 건출양식
※ 기단 : 건축물의 터를 반듯하게 다듬은 다음에 터보다 한 층 높게 쌓은 단
※ 배흘림기둥: 가운데는 굵고 위아래는 가늘어 시각적으로 안정감을 주는 기둥
※ 띠살문: 문살을 상중하 세 곳에 띠 모양으로 배치한 문
4. 적묵당, 의선각, 불이문, 범종루(해탈문)
▲ 적묵당(寂默堂)
▲ 의선각(毅禪閣, 종무소 및 요사채,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제29호)과 불이문(不二門)
의선각은 승병장 영규(靈圭)대사가 갑사와 보석사를 오가며 수도할 때 머물던 건물이다. 영규대사는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병 800여 명을 모아 의병장 조헌이 이끄는 700여 명의 의병과 함께 청주전투에 참전하여 청주성을 탈환하였고, 그 뒤를 이어 제2차 금산전투에 참전하였으나 8월 18일 왜군과 격렬한 전투 끝에 순절하였다. 의선각은 이공식의 맞배지붕 건물로 창녕위 김병주가 '의선각(毅禪閣)'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본래 의선각은 영규대사의 위패 외에 선사(禪師) 아홉 분의 영정을 모시고 있었으나 영규대사의 위패를 칠백의총 종용사로 이전하면서 현재는 스님들이 생활하는 요사채로 사용하고 있다.
※ 익공식 : 기둥과 보 사이에 새 날개 모양의 장식을 배치한 기둥 양식
※ 창녕위 : 순조의 둘째 딸 복온공주와 결혼한 부마로서 김병주에게 주어진 관직의 이름

▲ 범종루(梵鐘樓, 2층)와 해탈문(解脫門, 1층)
5. 지장전
▲ 지장전(地藏殿)
▲ 지장전 오른쪽 길을 통해 보석사주차장 방향으로 내려갑니다.
▲ 왼쪽으로 보이는 건물은 해우소(화장실)입니다.
6. 의병승장비
▲ 앞쪽 삼거리의 오른쪽 길은 보석사 은행나무에서 바로 내려오는 길이고, 삼거리 오른쪽으로 의병승장비가 있습니다.
▲ 의병승장비(義兵僧將碑, 문화재 자료 제23호)
의병승장비는 1592년(선조 25) 8월 18일에 치러진 제2차 금산전투에서 의병장 조헌(趙憲)과 함께 순절한 승병장 영규(靈圭)대사와 승병들을 추모하기 위해 1839년에 금산 보석사 입구에 세운 비이다. 비의 몸체는 높이 243cm, 폭 83cm, 두께 39cm이며, 비각의 오른쪽에는 의병승장비의 내용을 한글을 풀이하여 청동판에 새긴 영규대사 의선각비가 있다. 의선각비에는 1839년(현종 5) 5월 금산군수 조취영이 비를 세웠고, 우의정 조인영이 비문을 지었으며, 충청도 관찰사 조헌영이 비각을 세웠다는 내용이 전한다. 비의 앞면에는 큰 글자로 '의병승장' 이라고 새겼으나 자획이 심하게 훼손된 상태이고, 왼쪽 면에는 창건화주 낙봉대인 등 비를 세울 때 참여했던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고, 오른쪽 면에는 '의병승장' 이라는 글자를 쓴 사람이 창녕위 김병주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인 1940년에 일본 경찰이 비각을 부수고 비문의 글자를 훼손하여 땅에 묻었으나 1945년 광복 이후에 다시 세웠다. 1979년 비각을 세웠고, 1980년 영규대사 국역비를 건립하였다.
※ 비각 : 비를 세우고 비바람 따위를 막기 위하여 그 위를 덮어 지은 건물
※ 창녕위 : 순조의 둘째 딸 복온공주와 결혼한 부마로서 김병주에게 주어진 관직의 이름
7. 보석사 일주문
▲ 진악산 보석사란 현판이 달린 보석사 일주문(一柱門)
8. 보석사주차장
▲ 보석사주차장에서 진악산 산행 및 보석사 관람을 마칩니다. 보석사를 찾으시는 모든 분들이 건강하고 행복하시기를 기원드립니다.